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에미야 키리츠구 (문단 편집) ==== 폭력적인 방법에 경도된 모습 ==== 한편, 비폭력적인 평화 추구도 있는데 키리츠구는 오로지 폭력으로 사태를 해결하려 했다고 비판하기도 한다. 하지만 비폭력으로 유명한 [[마하트마 간디]]의 비폭력 운동이 상대가 [[영국]]이 아닌 [[소련]]의 [[이오시프 스탈린]]이었다면 통하지 않았을 거라는 말이 많다. 실제로 간디와 비슷하게 영국 제국주의에 반대하던 [[조지 오웰]]과 같은 인물도 2차대전 당시 [[나치즘]]이란 그보다 더한 악에 대항하기 위해서 영국의 전쟁 노력을 지원하면서, 간디의 비폭력 노선은 영국 치하에서나 통할 수 있는 것이지 [[추축국]] 치하에서는 그런 것조차 할 수 없다는 의견을 피력하기도 했다.[* 이러한 시각을 반영한 작품으로 해리 터틀도브의 [[대체역사소설]]인 [[최후의 신조]]가 있다.] 또한 [[현실]]에서 비폭력적인 방법으로 평화가 이룩된 사례가 얼마나 있었는지도 봐야 한다. [[뮌헨 협정]]을 들어가 보면 알겠지만 폭력을 미루고 평화를 추구하다가 [[제2차 세계대전|세계가 한번 휘청였으며]], 키리츠구가 활동했던 분쟁 지역의 문제가 비폭력으로 해결 가능한 문제였으면 왜 아직도 현실에선 분쟁이 끊이질 않는가? 그 쉬운 걸 아무도 못 해서? '''비폭력으로 평화를 추구하는 건 쉽지 않다.''' 오히려 비폭력만을 주장하다가 무너지는 게 부지기수다. 비폭력으로 해결될 걸 오로지 폭력으로 해결하려 했다고 비판한다면 인류사의 수많은 분쟁들은 비폭력으로 해결할 수 있는데도 아무도 그렇게 하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하지만 키리츠구 역시 폭력으로 평화를 만드는 법 말고 그 외의 방식으로 평화를 구현하는 방법을 몰랐다는 것을 고려해 본다면, 아무리 폭력만이 폭력을 해결할 수단이라고 친다고 해도 '''비폭력이 비록 완전히 폭력을 해결하지는 못해도 평화를 만드는 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된다는 사실을 간과한 것,''' 그리고 폭력을 해결해 올 수단을 폭력 그 자체뿐이라고 고착화시킨 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상당한 실책일지도 모른다. 실제로 폭력의 악순환을 낳는 전제 중 하나가 '''"폭력을 폭력으로만 해결할 수 있다."는 사고를 의식/무의식적으로 전제하에 깔고 행동하는 것이다.''' 이렇게 폭력을 대놓고 긍정해 버리면 가장 먼저 폭력을 최선책으로 사용해서 문제를 일으킬 가능성도 크다. 아이러니하게도 키리츠구 본인은 이러한 폭력적인 방법이 옳지 않다는 자각을 가지고 있었다. 실제로 성배가 보여준 내면의 회답에서 성배가 보여준 자신이 지향한 방법을 부정했고, 이렇게 하는 것 이외의 방법을 필요로 했기 때문에 성배를 원한다고 답한다. 하지만 성배는 '''네가 알지도 못하는 방법으로 너의 소원을 들어줄 수는 없다. 네가 세계의 구제를 바란다면, 그것은 네가 알고 있는 수단에 의해서만 성취될 수 있다.'''라고 답하며 키리츠구가 바라던 기적을 부정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